찬장 맨 아래 칸, 손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에 손잡이가 조금 깨진 컵이 있습니다. 흰 바탕에 파란 줄이 한 바퀴 둘러져 있고, 바닥 가까운 곳에는 가는 금이 하나 지나갑니다. 새 컵이 여러 개 생겼는데도 아침이면 저는 어김없이 그 컵을 꺼냅니다. 물을 따르면 금이 간 자리에서 물이 새지는 않을까 싶어 한 번 살피고, 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합니다. 십 년 가까이 매일 되풀이해 온 작은 의식입니다.
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. 그렇게 낡은 컵을 왜 아직도 쓰느냐고요. 위생이나 안전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저도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.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까요. 금이 간 컵은 언젠가 완전히 깨질 수 있고, 그 사이에는 세균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. 그런데도 저는 새것으로 바꾸지 못합니다. 이 글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해 보려는 아침의 기록입니다.
컵이 우리 집에 온 날
그 컵은 스물아홉 살 겨울에 얻었습니다. 처음 독립해서 얻은 작은 방에는 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. 이사하던 날 밤, 짐 정리를 대충 끝내고 목이 말랐는데 물을 마실 그릇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. 편의점까지 걸어가 가장 먼저 눈에 띈 컵을 샀습니다. 이천 원쯤 했던 것 같습니다. 포장지도 없이 비닐에 담긴 그 컵에 수돗물을 받아 마시던 밤의 기분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. 낯선 방의 낯선 공기 속에서 컵 하나가 갑자기 집이라는 느낌을 만들어 주었습니다.
그 뒤로 컵은 제 생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. 새벽에 일어나 물을 마시고, 야근하고 돌아와 보리차를 데워 마시고, 아픈 날에는 꿀물을 타 마셨습니다. 쓰는 사람의 손에 가장 자주 닿는 물건은 어느새 그 사람의 습관을 닮아 갑니다. 컵은 제 오른손 모양에 맞게 조금씩 닳았고, 저는 컵이 닳는 속도에 맞추어 조금씩 어른이 되었습니다.
금이 간 날의 기억
컵에 금이 간 것은 이 년쯤…
WALMONG FREE READING
이 글의 앞부분을 읽고 계세요.
무료로 가입하면 매달 서로 다른 글 3편을 끝까지 읽을 수 있어요. 마음에 남는 글부터 천천히 골라보세요.